철학

과학과 무지의 철학

홈런볼짱11 2022. 8. 18. 18:40

소크라테스는 고대 아테네 시민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라고 외치며 이른바 무지의 자각을 설파한 것으로 유명하다. 민주주의가 타락하여 우민 정치의 양상을 보이고 지식인들은 궤변론자로 둔갑하는 상황에서 그는 무엇보다 우리들 각자가 누구인지 알고 나로서 자기 자리를 지키며 살다가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한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가 이 세상에 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자각으로부터 앎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고 그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동안 결국 지혜를 터득하는 즐거움을 얻기도 하기 때문이다.

 

논리적 추론으로 합리적 비판을 하자

 이러한 자각은 철학적 전통에서보다 오히려 과학적 탐구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부각된 경향이 있다. 철학은 실험과 관찰같은 경험적인 검증 방법에 의존하지 않고 주로 사변적 추론에 의지하기 때문에 자기비판적 기제가 상대적으로 약하다. 더구나 철학은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영원한 진리의 추구라는 형이상학적 사명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이러한 측면은 종교적 신앙 및 그 권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개방적인 사유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게 마련이다. 이마누엘 칸트가 사변적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고 비판철학을 정립하였을 때 그것을 스스로 독단의 잠에서 깨어남으로 표현한 것도 이러한 자각을 환기시켜준 철학사적 사건이었다. 철학사적 관점에서 보면 칼 포퍼가 지적한 바와 같이 언어의 출현 특히 논리적 추론에 의해서 비로소 합리적 비판이 가능해졌다. 원래 인간 사회는 신화나 종교의 형태로 표 현되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서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면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었다.

 그러나 체제가 제공하는 진리는 원하고 불변하며 불가침의 성역으로서 한 세에서 다음 세로 전수되어 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화가 탄생하고 승려 제도가 등장하고 나중에 학교가 생겨 났다. 포퍼는그의 추측과 논박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런  종류의 학교는 새로운 생각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새로운 생각들은 이단이며 분열을 조장한다. 그 학교의 구성원이 이제까지 신봉하던 교설을 고치려 들면 그는 이단으로 추방당하고 만다.

 그런데 이단은 대개 자기가 말하는 것이 원래 그 창시자가 의도한 교설의 뜻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이야기를 한 사람 자신도 자기의 이야기가 결코 새로운 것이라고는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가 하는 것은 참된 전통으로 복귀하는 것이라고 이단자 자신은 믿는다.

 

 

철학과 달리 과학은 회의적 태도를 인정하다

 철학의 탄생과 함께 종교적 신념을 합리적 차원에서 논증과 실증적 방법으로 다시 검토하게 되었을 때 이러한 형태의 지식은 흔들리기 시작하다. BC 6세기경 탈레스에서 시작하여 이낙시만드로스와 아낙 시메네스에 의해 신성불가침의 진리를 전수하기만 하던 독단적 전통이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그 후 300년이 지나 소크라테스가 인간의 행위와 사회 제도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러한 접근 방식을 도입하였을 때 비판적인 합리적 사고가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철학은 형이상학을 매개로 해서 항상 종교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비판적 합리성을 발휘하는 데 있어서 분명히 한계가 있다. 더구나 과학적 탐구의 경우와 달리 경험적 증거보다는 사변적 논증이나 추론적 분석에 더 많이 의존하기 때문에 방법론적 제한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과학은 방법론적 한계를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과학적 탐구의 본질에만 충실하기 때문에 무지를 긍정하고 불확실한 것을 거부하지 않으며 회의적 태도를 당당하게 인정하는 특징을 지닌다. 저명한 물리학자인 리처드 파인만은 과학의 가치라는 강연에서 과학자는 어떤 문제의 해답을 모를 때 무지한 것이며 그 결과를 어느 정도 예상만 할 수 있다면 불확실한 것이고 과학자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더라도 여전히 회의한다고 고백한다.

 그는 또한 과학의 발전과 진보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무지함을 깨닫고 확실시되는 것들에 해서는  어느 정도는 회의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웠다고 말한다. 과학적 지식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정도의 확실성을 갖는 명제들의 집합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자들은 이러한 생각에 매우 익숙하기 때문에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것도 사실은 매우 일관성 있는 태도라는 것과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고백한다. 

 파인만은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물리적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엄청나게 축적되면 될수록 이러한 움직임들은 일종의 무의미한 움직임일 뿐이라는 확신만을 주게 된다. 과학은 직접적으로 선과 악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과학적 탐구의 궁극적 목적은 자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이 소중한 가치로 간직하는 무지와 불확실성과 회의적 태도는 왜 그토록 우리에게 중요한 것일까. 그것은 이러한 태도와 과정을 거쳐서만 진리로 그만큼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학적 탐구의 궁극적 목적은 진리와 확실성과 확신이 가져다주는 자유라고 할 수도 있다. 그는 우리의 추론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라고 지적하며 이렇게 말한다.

 인류의 긴 역사에 있어서 현재는 마치 충동적인 젊은 시절과 비슷하므로 우리는 심각한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아직 어리고 무지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해답을 찾았다고 단정 짓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심각한 오류 를범하는것이다. 만약 우리가 정답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고 마침내 구원을 받았다고 자처한다면 다른 모든 토론과 비판을 억압한다면 제한된 상상력으로 권위의 사슬에 인류를 얽매어 두는 셈이다.

 파인만은 여기서 과학자의 책임을 의식하며 이렇게 계속 말한다. 무지의 철학으로부터 위대한 발견이 이루어짐을 깨닫고 위대한 발전은 자유로운 사고의 결실이라는 것을 인식하여 자유의 가치를 주장하는 것이다. 회의는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환영해야 할 것이며 자유를 요구하는 것이 미래의 후손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인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과학적 탐구의 거시적 열매인 과학 기술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무지를 긍정하고 불확실성을 수긍하며 회의를 일상화하는 그 탐구의 과정에 더욱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과 생활 태도가 진정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소크라테스가 설파한 무지의 자각은 철학자들보다는 과학자들에 의해서 더 많이 계승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